글
여름이 끝나갈 때, 가볍게 나선 길
시선/Landscape
2008/11/18 00:48
이른 추석이 지난, 아직 여름날씨였던 어느날. 잃어버린 지갑때문에, 학교에서부터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다. 은행에서, 동사무소에 가서 신분증을 재발급 신청하면 주는 신분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학교 근처 동사무소로 향했다. 학교가 있는 곳 자체가 시골이라, 학교 근처만 상권이 꽤 발달한 곳이라 근처에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날 남은 반나절을 다 소모한 꽤 긴 여로가 되어 버렸다.
처음 가는 길이라,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 동사무소죠?"
"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신분증 재발급때문에 그러는데, S 대학교에서 어떻게 가야 하나요?"
"아 그러시면, ○○중학교 어디인지 아세요?"
"○○중학교요? ○○초등학교라면 아는데..."
"그곳 지나서 한참 오시면 되요. ○○중학교 근처에 있어요.
걸어 오시기에는 좀 먼데..."
"예. 알겠습니다. 금방 찾아갈께요."
사실, 걸어다니는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집에서 부모님 가계가 있는 곳까지 한시간 거리를 방학동안 매일 걸어다니다시피 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걷는것은 꽤 좋아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한가지 간과한게, 도시에서 멀다와 시골에서의 멀다는 거리개념 자체가 틀리다는 것이였다.
방향은 잘 잡았었다. 학교에서 자취방이 있는 방향으로 좀 더 멀리. 그 거리는 15분이면 걸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보이는 ○○초등학교. ○○중학교는 그 바로 옆이라고 생각했는데, 근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걸어가다가, 처음 마주하는 삼거리. 이쪽까지는 군대 가기 전에도, 복학한 다음에도 한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길이라, 잠시 머뭇거렸다. 마침 조금 전에 지나친 방앗간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계셨던 것이 기억이 나서, 조금 되돌아가 여쭤 보았다.
"저기, 할아버지. ○○중학교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 거기라면 이 길을 쭉 따라 직진하다가,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쭉 가면 되. 그런데 걸어가기에는 좀 멀텐데."
"괜찮을 거예요. 제가 좀 많이 걸어다니곤 했거든요. 감사합니다."
사실, 택시를 부르기에는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기도 했었다. 잃어버린 지갑 안에 일주일치의 생활비도 들어 있었고, 대부분의 자취생들이 그렇듯 나도 생활비 자체가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은 편이였다. 그만큼 걸어 다니는데에 자신감도 있었고.
하지만 이게 왠일? 그 너머로 10여분가량 걸었더니, 그 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왼쪽이나 오른쪽에 멀리 창고같은 건물들만 한두채 보이거나, 트럭같은 차들이 왕복 이차선 도로 옆으로 스쳐 지나갈 뿐. 걸어다니는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았고, 너머에는 과수원이나 밭이나 논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시간은 오전이 끝나가는 시간이였고, 날은 점차 더워지고 있었다. 올해는 추석이 이른 편이라 아직 아침저녁으로 좀 서늘해 져 가는 것 같았지만 낮에는 여전히 더웠었다. 녹음은 좋아하지만 더위에 약한 나는, 쉬이 지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 위에 마땅히 쉴 만한 장소도 보이지 않았고, 가로수가 심겨져 있는 부분은 약간씩 뿐. 가방에는 책과 필름과 빵빵한 필통과 수업용 프린트로 가득해 무게로 압박을 해 오고 있었다. 다행인지 출발하기 전에 가져 온 작은 물통만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길은 보는 재미는 있었다. 항상 다니던 학교에서 한 이삼십분쯤 걸었을 뿐인데 분위기도 확 틀렸고, 동네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시기가 지나 시들고 지기 시작한 연꽃으로 가득한 작은 수원도 있었고, 아직 녹음이 무성한 과수원도 있었고, 길가 보도블럭 옆에 자그마한 화단이 꾸며져 있는 부분도 있었다. 중간 중간 사람은 없지만 잘 가꿔진 텃밭이 있는 골목도 있었다.
그렇게 길을 스쳐 지나가며, 중간중간 한숨 돌리며 사진도 찍어 가며, 대충 한시간정도를 걸었다. 자그마한 사거리를 지나, 저 멀리 철길이 보이며 그 너머 작은 군락이 보였다. 읍내라고 하기에는 좀 자그마한 느낌의 군락이였다. 다가가니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들도 중간중간 보였다. 그중 한 분께 동사무소로 가는 길을 여쭤보니, 철길을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간판이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삼거리를 지나, 대충 5분쯤 지나 내 작은 여로는 막을 내렸다...
결국 그날 신분증을 재발급 받지는 못했다. 예전 사진이 찍은지 너무 오래 된 증명사진이라 새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내에 좋은 사진관을 알려주셨지만, 차마 그곳까지 갈 여유를 얻지 못해 학교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어 다음날 다시 다녀왔다.